봄을 재촉하는 비가 시도 때도 없이 줄금 그렸다. 그 비가 눈이 되어 내리기도 해 산과들이 하얗게 표백되기도 했다. 밤새 골목을 휘돌아다니던 바람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문틀을 흔들어댔다
속도가 멈추어 버린 듯하던 겨울, 그 끝에 찾아온 이 따스함은 계절의 시계 판에 태엽을 감은 듯 속도를 내게 하고 그 출발선에 서 있는 초봄은 잔설이 남아 있는 겨울의 추억을 껴안은 채 봄날의 따스함을 맞이하다보니 이리저리 비틀대며 곤두기침을 해 대며 사흘이 멀다하게 파도를 일으키며 육지와의 뱃길을 끊어 놓는 것 같다
하기야 춘분도 지나고 청명 한식이 열흘 안짝인데 바람도 바꿔 불어야 되고 햇볕도 바꿔 풀어야 되다보니 얼마나 바쁘겠나싶기는 하다. 벌서 몇 주 주말마다 이런 날들이 이어지다보니 쉬는 날이 되어도 어떻게 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오늘도 봄눈이 군무를 추는 하늘을 보며 고민만 하다가 ‘이 보다 더 험한 날도 떠나지 않았던가?’ 하는 결론과 함께 결단성과 적극성을 최대한 발휘해 성인봉을 향해 떠났다.
야산골짜기에도 아직 잔설이 남아 있기에 동행자도 없이 높은 산을 오른다는 것은 두려움과 걱정이 함께 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눈이 더 녹기 전 꼭 성인봉을 오르고 싶었던 것은 몇 주 전 몇 명의 사람들이 정상부근에서 설동을 파고 그 속에서 특별한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는 이야기에 그렁저렁 살아가는 활력 없는 마음에서 불일 듯 일어난 ‘그 느낌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그들이 파 놓은 설동이라도 구경해 보았으면 해서였다
산 들머리에서 부산에서 왔다는 한 청년을 만났다. 혹시나 하는 염려로 스틱이며 아이젠 등 겨울장비를 한가득 메고 출발한 나와는 달리 배낭하나 달랑 메고 나선 그 모습이 너무 가벼워 보여 걱정이 되었다
‘위에는 아직 눈이 많을 텐데, 아이젠도 없이 미끄러울 텐데... 하기사 젊으니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르고도 남겠다’
나 혼자 걱정하고 나 혼자 결론을 내리며 출발하는 내 뒤로 그 청년이 따라왔다
지난밤에도 비를 뿌리고 바람이 불어대더니 이곳은 그것이 눈이 되어 휩쓸려 다녔는지 어둠이 내려앉은 밤 모양 ‘저 방향으로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천지분간이 되지 않는 막막한 모습이다.
물컹물컹 녹아내리던 눈이 시린 봄밤에 딱딱하게 굳고 그 위에 살포시 얹힌 새눈은 유연제가 섞인 듯 미끄러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빴다. 가풀막진 길을 한참 오르다 뒤돌아보니 다행히 청년은 눈 밟을 일이 별로 없는 곳에 사는 사람답지 않게 잘 따라오고 있었다.
정상이 900m라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는 지점을 지나서부터 얼음 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어가면서부터 오르기 시작한 기온에 두둑두둑 떨어지는 얼음덩이들은 깨끗한 눈 위에 이리저리 DNA 연결고리 같은 흔적을 남겼다
다 떨어져 버리기 전에 빨리 올라가자는 욕심은 마음뿐이고 진기가 다 빠져 버린 듯한 몸은 수도자들의 경건한 걸음처럼 느릿느릿했다
그렇게 오른 성인봉은 방향에 따라 상고대와 눈꽃이 겹쳐 피어 치장을 하고 있었고 오락가락하는 구름사이로 내려 비취는 햇살은 무대에 조명을 넣듯 들락거리며 시린 손을 잊게 하며 포근함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힘들고 괴로웠던 마음은 간곳없고 뇌 속에서 새 이성을 만나면 분비된다는 도파민만 분출된 듯 황홀함에 빠져 빙글빙글 웃었다.
말잔등 가는 능선 아래쪽으로 누군가의 발자국이 화살표처럼 나 있었다. 저 자국만 따라가면 설동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한참을 들어갔다
기대와는 달리 그 자국은 중간에 끊겨있었다. 그것이 설동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는데 난 그 발자국이 그곳으로 가는 것인 줄로 철석같이 믿었다
솔직히 그 발자국의 주인도 나처럼 설동을 찾아 들어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아직도 떼칠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설동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발자국을 따라 들어가다 만난 풍경은 ‘우와 우와’ 소리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겨우 내 북쪽에서 넘어온 차갑고 강한 바람은 남쪽 바람과 만나 능선을 중심으로 눈을 쌓아 올렸고 상대적으로 약한 남쪽 바람은 북쪽으로 넘어가지 못해 속살을 갈아먹으며 휘돌아 나가다보니 북쪽 바람이 넘나드는 능선은 딱딱하게 굳어 지붕역할을 했고 남쪽으로 휘어진 부분 아래로는 속살이 달아나버려 마치 처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뜻해진 날씨로 인해 무너져 내린 곳이 많았지만 일정부분은 동굴을 가로로 잘라놓은 듯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층층이 다져진 눈은 지리부도 책에 나오는 지층 같았고 들숙날숙 자잘하게 달려있는 고드름은 언젠가 다녀온 석회암 동굴 안에서 자라고 있던 종류석같았다. 특히나 눈이 없으면 발붙이기조차 힘든 비탈에 자라고 있는 나무마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수수송이 같은 눈뭉치들이 달려 있었다. 안개가 얼음 알갱이가 되어 박혀있는 그 눈 뭉치들은 바람에 지나갈 때 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처럼 반짝거렸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가이드가 발길을 멈추는 곳에서부터 진짜 볼만한 것들이 시작 된다” 또한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라고
난 오늘 설동을 찾겠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들어선 그곳에서 길가에서는 보지 못한 또 다른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허우적댔다
그렇게 서성대다 떠나는 내 뒤로 연극 끝난 무대에 막이 내리듯 눈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거짓말처럼...